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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Did It] 우주의 시작을 탐사하는 핵·입자물리학자 #124 한국물리학회장, 인하대 물리학과 윤진희 교수
#윤진희#물리학#여성과학기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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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2-22
우주의 시작을 탐사하는 핵·입자물리학자
한국물리학회장, 인하대 물리학과 윤진희 교수 (Ep.2)
입자와 핵물리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주의 초기 상태를 해독해 온 윤진희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가, 세계 최대 가속기 중 하나인 CERN의 ALICE experiment를 이끄는 국내 팀을 담당하며 ‘정말 근본 질문’들에 답하고자 한다.
물리학으로 세상을 읽다
입자와 핵물리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주의 초기 상태를 해독해 온 윤진희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는, 세계 최대 가속기인 CERN의 ALICE 실험을 통해 우주 탄생의 순간을 재현하며 ‘세상의 근본’을 좇고 있다.
그에게 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 학문”이다. 물리학은 대부분 근본적인 원리를 파악하고 검증하는 과정이며, 그중 핵물리는 원자 내 전자를 떼어낸 핵의 구조와, 그 속에서 입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을 규명한다. 윤 교수의 주요 관심사는 고에너지 핵물리로, 우주가 막 태어나던 시기의 극한 환경 속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거쳐 양성자와 중성자로 결합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입자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일은, 그 자체로 미시 세계를 해석하는 동시에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근원의 흔적을 되짚는 작업이기도 하다. 윤 교수는 물리학이 기초이자 첨단의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수십 년 동안 오직 ‘궁금증을 해결하는 기쁨’ 하나로 묵묵히 이 길을 걸어온 이유도 그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전공과 연구의 뿌리: 핵물리학에서 우주로
윤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대학교에서 핵물리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연구는 원자핵을 이루는 입자들의 강한 상호작용(Strong Interaction)을 중심으로, 고에너지 충돌 실험을 통해 핵의 구조와 물질의 근원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핵물리학은 아주 작은 입자들이 서로 결합해 더 큰 입자를 만들어내는 학문이다. 그 과정이 인간 사회의 관계망과도 닮았다”고 말한다. 몇 개의 입자만으로도 수많은 조합과 결과가 만들어지는 세계, 그 복잡함 속의 질서가 윤 교수를 매료시켰다.
그의 연구는 단순히 입자 충돌 실험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충돌 후 생성된 수천, 수만 개의 입자 궤적을 분석하고, 각 입자의 운동량과 에너지를 정밀하게 계산하여 핵 내부의 힘과 구조를 역산해낸다. 이 과정에서 윤 교수는 ‘모멘텀 킥(Momentum Kick) 모델’을 비롯한 다양한 이론적 해석 방식을 적용해 왔다.
윤 교수는 “입자 하나하나의 궤적에는 우주의 기억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물리학은 거대한 퍼즐의 조각을 맞춰가는 일이며, 그 퍼즐을 완성할 때마다 우주의 또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CERN의 ALICE 실험과 QGP 탐구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위치한 CERN(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 은 전 세계 물리학자들이 모이는 가장 거대한 실험 무대다. 그 중심에는 LHC(Large Hadron Collider, 대형 강입자 가속기) 가 있다. 이 장치는 입자를 빛의 속도의 99.99% 이상으로 가속시킨 뒤 서로 충돌시켜,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우주 초기의 온도와 밀도를 재현한다.
LHC에서는 네 개의 대형 국제 공동실험 ATLAS, CMS, ALICE, LHCb이 진행되고 있다. 그중 윤진희 교수가 참여하고 있는 ALICE는 핵물리학에 특화된 실험이다. 이곳에서는 양성자-양성자(pp) 혹은 납-납(Pb-Pb) 충돌을 통해 만들어지는 극한 상태의 물질, 즉 쿼크-글루온 플라즈마(QGP, Quark–gluon Plasma)를 관측한다. 이 상태는 우주가 매우 뜨겁고 밀도가 높았던 태초의 순간, 즉 빅뱅 직후 존재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ALICE 실험에서는 그 ‘빅뱅 이후 백만분의 일 초’의 찰나를 재현해, 고온, 고밀도의 환경 속에서 쿼크와 글루온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해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물질을 형성하는지를 살펴본다.
윤 교수는 “ALICE는 우주의 시작을 실험실에서 다시 열어보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2016년부터 2022년까지 그는 ALICE 한국 대표팀을 이끌며 국제 공동연구를 주도했고, 현재는 인하대학교의 권민정 교수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최근 ALICE 실험팀은 ‘브레이크스루상(Breakthrough Prize in Fundamental Physics)’을 공동 수상했다. ‘과학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이 상은 ALICE, CMS, ATLAS, LHCb 등 네 개의 LHC 실험팀에 소속된 수천 명의 연구자에게 돌아갔다. 윤 교수는 이에 대해 “수많은 연구자의 협업이 만들어낸 결실”이라며, “개별의 발견보다 ‘함께 이뤄낸 지식의 확장’이야말로 현대 과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ALICE 실험은 단순히 거대한 장비를 다루는 기술적 시도를 넘어, 우주의 기원을 실험실 안에서 되살리는 도전이기도 하다. 윤 교수는 현재도 ALICE 실험의 국내 연구그룹을 이끌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초과학과 첨단기술의 접점
윤 교수의 연구는 실생활에서 바로 쓰이는 기술을 만들지는 않지만, 인류 지식의 뿌리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는 “우주 초기 상태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초전도체 기술, 반도체 기술, 인공지능(AI) 등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된다”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WWW(World Wide Web) 이다. CERN은 전 세계 공동연구진이 데이터를 공유하기 위해 이 기술을 개발했는데, 오늘날의 인터넷이 그로부터 출발했다. 이처럼 기초연구는 직접적인 상용화를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기술 발전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윤 교수는 “기초물리학이 약해지면 첨단기술도 설 뿌리를 잃는다”며, 사회 전체가 기초연구의 가치를 다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물리학을 통해 사회와 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학계뿐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에도 힘쓰고 있다.
한국물리학회 첫 여성 회장으로서의 리더십
2024년, 윤진희 교수는 한국물리학회 72년 역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바꿉시다. 우리 모두의 물리학회로”라는 슬로건 아래, 그는 수도권·대학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연구자와 산업체 연구자, 학생, 그리고 젠더 다양성을 포용하는 학회를 만들고자 한다.
윤 교수는 “물리학회는 더 이상 특정 세대나 기관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후학들이 보다 열린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정책적 변화를 이끌고 있으며, 연구비 지원의 투명성 강화, 대학 물리학과의 위축 문제 해결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의 리더십은 단순한 ‘여성 최초’의 상징을 넘어, 한국 과학계의 구조적 다양성과 포용을 확장하는 계기로 평가된다. 윤 교수는 “제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 그게 과학자로서, 그리고 선배로서의 제 몫”이라고 말했다.
물리학자의 길,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꿈
윤 교수는 QGP(쿼크-글루온 플라즈마) 와 고에너지 충돌 데이터를 보다 정밀하게 해석해, 우주 초기 상태와 물질의 근원을 밝히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ALICE 실험을 통해 얻은 방대한 데이터를 고도화된 분석 기법으로 해석함으로써, 입자 간 상호작용의 세부 구조를 규명하고 우주 진화의 물리적 조건을 구체화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한국 핵입자물리학이 국제 공동연구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검출기 설계와 데이터 해석 기술의 자립 역량 강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또한 윤 교수는 기초과학의 사회적 가치 제고를 중요한 과제로 꼽는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하는 연구 환경 속에서도, 물리학이 단순히 ‘실용성이 부족한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이끄는 근원적 기반임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물리학이야말로 기술과 문명의 출발점이며, 인류가 스스로의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후학 양성도 그의 연구 비전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윤 교수는 제자들이 실험적 성취를 넘어, 자신의 연구를 스스로 설계하고 문제를 정의할 수 있는 과학자로 성장하길 바란다. 그는 “정답을 찾기보다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진정한 연구자”라고 강조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학제 간 연구 환경과 지속 가능한 과학 생태계를 만드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입자·핵물리학이라는 ‘가장 작은 세계’ 속에 담긴 거대한 질문,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윤진희 교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실험실과 국제협력 현장을 오가며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의 연구는 과학의 언어로 우주를 해석하고, 그 해석이 다시 인류의 이해로 확장되는 다리와 같다. 그는 오늘도 실험실에서, 강의실에서, 학회에서 “과학의 본질은 사람”이라는 신념을 지켜가며, 다음 세대에게 빛이 되는 물리학자의 길을 닦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