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경이롭다!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미생물의 생명현상을 연구하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미디어센터 노정혜 이사장(Ep.1)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쉬디드잇(She Did It)은
대한민국 유일의 여성과학기술인
롤모델 발굴 프로젝트입니다.
2025년 쉬디드잇 시즌 6는
‘글로벌’을 테마로 전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재외한인 여성과학기술인과 국내 여성과학기술인을 조명합니다.
과학기술의 언어로 세계와 소통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길을 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여성과학기술인의 삶과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써 내려간 이야기가 ‘우리’가 써 내려갈 이야기가 되도록
예비 여성과학기술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영감을 전하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 어린왕자의 말처럼 미생물학자
노정혜 교수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생명체들을 연구하며 경이로운 생명현상을
발견했다. 미생물이 불러일으키는 경탄과 영감은 그를 세계적인 권위의
생명학자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고 삶의 자양분이었다.
1975년 당시 서울대의 신생학과였던 미생물학과에 입학한 그는 자연대를 수석으로 졸업, 미생물을 분자 차원에서 연구하는 분자생물학의 명문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분자미생물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를 역임했으며 서울대 연구처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등을 거쳐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미디어센터 이사장, 미국 미생물학회 종신회원으로서 과학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Q 교수님의 전공 연구 분야를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미생물학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생물들(microorganisms)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세균(bacteria), 고균(archaea), 진균(fungi), 작은 원생생물(protists), 그리고 바이러스와 같은 생물체들이 미생물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저는 세균과 단세포성 진균인 효모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원리를 연구해왔습니다. 특히 산화환원의 변화, 영양분의 고갈, 그리고 항생제에 대한 대응반응이 분자적으로 어떤 메커니즘으로 일어나는 지에 대한 연구를 해 왔습니다.
Q 미생물학, 분자생물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생물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던 차에, 서울대학교에 미생물학과라는 신생학과가 생겼는데 전망이 밝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은 의과대학으로 진학하기를 바라셨지만, 피를 싫어하는 제 적성이 의사와 맞지 않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미생물학과를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미생물에서 발견되는 효소와 유전현상들이 분자생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던 시대라, 미국의 대학원에 진학하여 유전자 발현의 첫 단계인 전사(transcription)의 기작에 대해 분자생물학 연구를 하였습니다. 1986년 귀국 후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에 분자미생물학 연구실을 열고 환경변화에 대한 미생물의 적응을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Q 교수님의 연구 분야는 어떻게 활용되나요?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중요한 생명현상들은 세균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원리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비교적 다루기 쉬운 미생물을 대상으로 찾아낸 생명의 원리들이 다른 생물체의 이해에도 많은 힌트를 제공합니다.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생화학적인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용적인 측면으로는 세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 몸의 일부인 마이크로바이옴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도를 찾아낼 수 있고, 병을 일으키는 감염균을 제어하거나, 고질적인 문제인 항생제 내성을 줄일 수 있는 방도를 찾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Q 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미생물이 인간보다 더 똑똑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야기해주세요.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생존력을 획득하기 위해 세균과 같은 미생물이 보여주는 생명현상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습니다.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나 같은 인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도 한 종류 세균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도 제대로 이해할까 말까 하니까요. 때때로 이놈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고 자손을 남기는 지고한 미션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미물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이들 덕택에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고, 그들이 사용하는 효소와 유전자를 얻어 와서 현대 생명과학과 공학의 거의 모든 도구들을 얻게 되었지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놀라게 됩니다.
Q 연구자로서의 현장 경험이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등 행정가로서 일하는 데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본인의 경험을 반영해 탄생한 제도, 프로그램 등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현장의 연구자가 행정 일을 맡게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조교수, 부교수 시절에는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교수로 승진한 직후 2년간 자연대학의 학생담당 부학장으로 대학행정에 관해 약간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2004년부터 2년간 연구처장으로 대학 전체와 우리나라의 연구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간간이 정부나 연구재단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며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도록 노력하는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로는 90년대 후반, 당시 과학재단의 요청으로 여성과학자의 임용과 연구 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는데, 그 프로그램들이 정부예산으로 뒷받침이 되어 여성과학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연구재단의 이사장이 된 이후에는 연구비신청과 관리절차를 간소화하고, 예측 가능한 연구비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학문 분야별 특성을 반영하여 유연한 연구비 지원체계를 마련한 것도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현장의 연구자가 행정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서울대 여교수회장과 다양성위원회 초대위원장을 역임하셨고 한국연구재단 최초의 여성 이사장으로 주목받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 특히 이공계에서 여성이 소수이며 기회의 문이 좁다는 것을 반증하는데요.
더 많은 여성이 이공계 연구자로,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 어떤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까요?
서울대 여교수회에서 양성평등을 포함하여 학교에 필요한 변화를 제안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학교 안에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존재와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다양성을 중요한 가치로 부각해야 한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그 제안을 총장님이 받아들여 총장직속 자문기구로 다양성위원회가 2016년에 출범했습니다. 다양성위원회 출범 이후, 여학생과 여교수들 뿐 아니라, 포닥(Post Doctor; 박사후원구원)을 포함한 비전임 교원/연구원, 외국인 교수와 학생 등 과소 대표된 그룹에 대한 통계작성이 정례화되었고, 다양성 증진 정책들이 제안되고 시행되는 선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우리사회가 가족 친화적이고 여성 친화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의 주체이자 돌봄의 주 담당자인 현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육아를 포함한 돌봄은 공적인 영역에서 전혀 보상받지 못하고, 여전히 모래주머니나 족쇄 같은 형태로 여성의 경제적 활동에 장애가 됩니다. 일하는 여성, 일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여성들이 더 많아져야 하고, 이들이 감당하고 있는 짐을 배우자와 가족, 기업과 사회가 함께 감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더 많이 더 깊게 확산되어야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조교수를 시작할 때 4살과 1살이던 아이들의 육아, 시부모님의 병간호를 많은 도움의 손길 덕분에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희귀한 여성 동료, 교수, 실험연구자로서, 제대로 역할을 해내야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사명감이 또한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여성들도 자신의 짐에 억눌려 하고 싶은 일이나 경제활동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견뎌내고, 사회적 활동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Q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여성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여성 리더십의 기본은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성취 자체보다 그 성취를 함께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와 지원을 하는 것이 여성 리더십의 핵심이란 생각을 합니다. 여성들은 일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자와 친구, 자녀들과의 관계를 인간적으로 이어가는 능력이 대부분의 남성들보다 더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리더로서 이러한 능력을 발휘할 때 우리 사회 곳곳의 기관과 공동체가 더 탄탄하게 발전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Q 지난 7월 한국과학기술미디어센터(Science Media Center Korea) 이사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소감을 부탁드리며 어떤 변화와 성과를 이루어갈 계획이신가요?
©한국과학기술미디어센터
한국과학기술미디어센터는 과학자와 언론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비영리 독립기관입니다. 사회적 관심의 대상인 과학기술 이슈에 대해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 언론에 전달함으로써, 정확하고 균형 잡힌 정보가 공정하고 신속하게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언론사 과학기술담당 기자, 기관의 홍보담당자들이 참여해야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SNS를 통해 각종 허위정보와 편견이 확산되는 이 시대에, 센터의 활동을 통해 일반 국민과 정책 입안자들이 근거에 기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Q 2010년부터 미국 American Academy of Microbiology, Fellow 종신회원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종신회원으로서의 활동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미국 미생물학 학술원은 전 세계적으로 38,0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미국 미생물학회에서 운영하는 학술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5명의 미생물학자가 fellow로 선출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명예직이고, 미생물학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논문출판과 학회활동, 사회기여 등 필요한 역할을 자유롭게 수행하도록 권면받고 있습니다.
Q 연구자의 길 선택을 고민하는 대학생 제자들에게어떤 조언을 건네고 싶은가요?
탐구하고 연구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면, 나중에 어떤 직장에서 일하게 될 지가 불분명하더라도 연구자의 길을 택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공계 진로의 끝판왕처럼 여겨지는 의사라는 직업은 현재 수입과 안정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우리나라의 고급두뇌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작용합니다. 그러나, 성적 줄 세우기에 따라 사명감 없이 걷게 되는 의료인의 길은 자신과 국가 모두에게 불행이 됩니다.
연구자들은 학교든 연구소든 기업이든 어느 직장에서건 미래를 열어가는 동력과 파급력을 제공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일을 하는 연구자들은 국가와 사회가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학위와 훈련과정이 끝난 후 어디에서 일하게 될 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어려울 수 있지만, 선진사회일수록 고급두뇌에 대한 수요가 높기 때문에 조만간 자신의 이력과 기대에 맞는 일터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불확실하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 없이 자신의 실력을 쌓아가다 보면 틀림없이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에 걸 맞는 수입도 자연스럽게 따라 옵니다.
Q 생명과학의 길을 걷는 연구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지구상의 생명체는 참으로 다양하게 다르면서도 공통된 생명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생명체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그 속에 흐르는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노력, 새로움을 찾되 넓이와 깊이를 다 추구해야 하는 입체적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끈기, 포기하고 주눅 들지 않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현업에서 은퇴한 후,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목표를 갖지 않는 것도 목표입니다. 그저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아볼 수 있는 때가 이제 선물처럼 주어졌다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에 나의 소명이 있다고. 사회에 필요하면서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