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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개발사례

롤모델

[She Did It] #120 델프트 공대 정지원 교수

조회수25 작성일2025.10.16

 

디자인 공학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다 

델프트 공대 정지원 교수(Ep.1)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쉬디드잇(She Did It)은 

대한민국 유일의 여성과학기술인 

롤모델 발굴 프로젝트입니다.

2025년 쉬디드잇 시즌 6는

‘글로벌’을 테마로 전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재외한인 여성과학기술인을 조명합니다.

과학기술의 언어로 세계와 소통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길을 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여성과학기술인의 삶과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써 내려간 이야기가 ‘우리’가 써 내려갈 이야기가 되도록

예비 여성과학기술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영감을 전하고자 합니다.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 공학과 에라스무스 대학병원 외과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정지원 교수.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공학은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이를 해결할 전략적·기술적 해법의 청사진 (Blueprint)을 설계하는 지적 탐구의 출발점이다.

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디자인과 기술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델프트 공대 

Design, Organisation and Strategy (DOS)에서

헬스케어 디지털화를 통한 네덜란드 의료 시스템의 혁신을 연구하고 있다.

 

 

Q. 학창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중국 상하이에서 국제학교를 다녔어요. 대학 과정을 미리 이수하는 IB Diploma 프로그램을 통해 화학, 심리학, 미술을 선택해 공부했는데, 이 세 과목은 저의 다양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조합이었습니다.

 

화학은 물질의 본질과 반응을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사고력에 관심이 있어 선택했고, 심리학은 인간 행동의 원인과 패턴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정해진 정답을 넘어선 제 생각과 감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에 매력을 느꼈죠. 저는 늘 세상의 근본 원리에 대해 궁금해하고 질문하는 아이였고, 이성적 분석과 감성적 표현이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였습니다.

 

 

Q. 디자인 조형학부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스24

고등학교 시절, 다니엘 핑크(Daniel Pink)의 A Whole New Mind: Why Right-Brainers Will Rule the Future를 읽으며, 일상 속 ‘설계(디자인)된 것들’이 인간의 행동과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제게 큰 영향을 준 한 순간은 아버지와의 대화였는데요. 기계공학자로서 자동차 개발 쪽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어떤 날에는 자동차에 쓰이는 실내 재료 중 ‘검정색’이 많이 쓰이는데, 이 동일하게 보이는 검정색에도 매트 블랙, 피아노 블랙 등 다양한 종류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저는 하나의 색조차 무한한 선택지를 품고 있고, 그 안에서 의도적인 ‘디자인’이 사람들의 경험과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디자인의 무한함을 느꼈었습니다. 그 경험은 제가 ‘디자인/설계’을 사회적 영향력의 도구로 인식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Q. 계속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신 순간, 그리고 디자인공학을 선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학부에서 산업 정보디자인 전공과 경영학부를 이중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디자인전공 학부에서는 창의성과 감각을 중시하는 수업이 많았다면, 경영학 전공에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측정 방법과 논리적 사고를 훈련받았습니다. 특히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경영정보시스템)나 Operations Management(운영관리)는 설계적 사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배우며, 디자인과 공학적 시스템 사고가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어요. 마침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인터페이스와 시스템 설계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커졌습니다. 이처럼 저는 디자인을 감성과 직관으로만 접근하기보다는, 공학적 사고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설계된 시스템으로 이해하려는 방식에 관심이 많이 갔습니다.

 

흥미를 가졌던 MIS는 사실 산업공학과 더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석사와 박사 과정에서 디자인 공학을 계속해서 전공했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어요. 저는 디자인을 단순히 ‘문제 해결(Problem-solving)’의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정의하는 것(Problem Framing)’이 더 근본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공학 분야, 특히 산업공학에서는 이미 주어진 문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최적화된 (Optimization) 방식으로 푸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디자인은 한발 물러서 “우리가 지금 풀려고 하는 문제가 진짜 문제일까?” “겉으로 보이는 문제 뒤에 더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묻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디자인공학은 문제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며, 기술을 통해 사회와 인간 중심의 시야로 접근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저는 그 ‘프레이밍’의 힘에 매료되었고, 지금도 그 질문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지금 몸담고 계신 델프트 공대를 소개해 주세요.

 

제가 일하는 TU Delft(델프트 공대)는 네덜란드에 있는 네 개의 공과대학(Technische Universiteit, University of Technology)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국립대학교입니다. 규모와 연구 성과 면에서도 네덜란드 내에서 가장 큰 공대이며, 유럽을 대표하는 연구중심 대학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 기업과 산학협력을 굉장히 활발히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네덜란드 기업인 의료기기 및 가전기기 브랜드 필립스 (Philips), 반도체 기기 기업 ASML 등은 물론이고 이웃한 독일의 자동차 기업들이나, 네덜란드의 주 및 지방정부, 병원 등과도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스타트업을 포함한 중소·중견 기업들과의 공동 프로젝트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TU Delft는 특히 헬스케어(Healthcare),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모빌리티(Mobility)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합니다.

 

 

저희 산업디자인공학부(Faculty of Industrial Design Engineering)는 특히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세계 여러 곳의 디자인·공학 교육기관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KAIST와 UNIST의 산업디자인학과가 설립 초기에 TU Delft의 커리큘럼을 적극적으로 참고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UNIST는 델프트 공대의 교수를 초대 학과장으로 초빙하여 학과 기반을 함께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Q. 델프트 공대의 산업디자인공학부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있을까요?

TU Delft의 디자인공학 교육은 “디자인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워질 수 있고, 가르쳐질 수 있는 학문이다”라는 철학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산업디자인 학과들이 입학 단계에서 포트폴리오나 실기를 통해 ‘타고난 재능’을 평가하는 것과 달리, 델프트는 이론과 방법론 중심으로 체계적인 디자인/설계 교육을 추구합니다. 디자인은 과학적 사고와 논리적 방법에 기반하여 학습 가능한 지식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죠. 우리 학부에서는 헬스케어, 모빌리티, 지속가능성, 인공지능(AI)과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를 중심으로 교육과 연구를 진행합니다. 

 

저희 학교는 기술 자체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회 문제들이 있고 이 문제들을 어떠한 기술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공과대학이지만, 기술 중심이 아니라 사회적 도전과 문제 해결 중심의 기술 개발 접근을 택합니다. 델프트 공과대학교(TU Delft)의 교육 비전은 단순히 기술적 역량을 갖춘 졸업생만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책임감 있고 혁신적인 해결책을 분석하고 설계하며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Q. 지금 연구하시는 분야는 어떤 것인가요?


먼저 '디자인'이라는 단어부터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일본어나 중국어로 디자인을 번역하면 ‘설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처럼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 표현이나 제품의 외형을 꾸미는 것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와 시스템을 설계하는 행위입니다. 특히 산업디자인공학은 기술을 활용해 복잡한 사회 시스템을 사람 중심적으로 변화시키는 설계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설계의 영역도 제품을 넘어서 서비스, 경험, 시스템 전체로 확장되고 있고, 특히 저는 이런 확장된 설계의 관점에서 헬스케어 시스템의 디지털 전환(Healthcare System Digital Transformation)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세 가지 연구는 각각 서로 다른 연령대와 헬스케어 시스템의 서로 다른 층위를 다루고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기술을 통해 의료 시스템을 더 사람 중심적이고 효율적인 구조로 재설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소아 만성질환 아동을 위한 디지털 자기관리 플랫폼 개발입니다. 예를 들어,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동이 일상 속에서 더 활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웨어러블 트래커, 모바일 앱, 센서 기술 등을 활용해 신체 활동을 측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부모와 의료진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스마트홈 기반 건강 관리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기술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가족, 의료진의 실제 경험과 니즈를 반영해 공감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설계하는 것입니다. 아동기의 건강한 생활 습관은 평생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연구는 예방적 관점의 디지털 헬스케어 전략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네덜란드의 기초 정신건강 시스템(Basis Geestelijke Gezondheidszorg)에서 초기 상담 및 분류(intake interview)를 AI 기반 인터뷰 에이전트로 디지털화하는 연구입니다. 현재 네덜란드에서는 정신건강 진료 대기 시간이 길고, 특히 첫 인터뷰 과정이 수작업 중심이라 심리 전문가들의 행정적 부담이 매우 큽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희는 AI 인터뷰 에이전트와 자동 보고서 생성 도구를 공동 개발하고 있으며, 이는 환자의 진단 정보와 치료 선호도를 구조화된 방식으로 정리해,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합니다. 단순히 효율성 향상을 넘어서, 환자의 경험을 개선하고 치료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네덜란드의 1차 의료 환경에 최적화된 의료용 대형 언어모델(Medical LLM)을 개발하는 연구입니다. 현재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의 업무 부담은 매우 높은 수준이고, 이로 인해 환자 접근성, 진료의 질, 의료진의 번아웃 등이 심각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GP 진료 기록 요약, 상담 문서 작성, 진단 가이드 제공, 트리아지(Triage) 보조 등 다양한 업무를 LLM이 지원할 수 있도록 설계 중입니다. 특히 이 모델은 네덜란드어 기반으로 훈련되고 있으며, GP, 보조 인력, 환자 대표들과 함께 어떤 업무를 자동화할 것인지 공동 설계(co-design)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연구들은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 산업체, 대학 등으로 구성된 다학제적 컨소시엄(consortium) 안에서, 많은 전문가, 박사과정 학생, 포닥 연구원들과 함께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분야도 다르고 접근 방식도 다르지만, 함께 협업하며 시너지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연결되는 교육 활동으로는, 제가 가르치고 있는 Tech Enabled Innovation Studio (TEIS) 수업이 있습니다. 이 수업은 학생들이 실제 기업과 정부기관의 사회적 과제를 중심으로, AI와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문제를 정의하고, 솔루션을 설계하고, 프로토타입과 실행 로드맵까지 제시하는 실무형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수업에서 다루는 주제들도 주로 헬스케어, 지속가능성, 공공서비스처럼 사회적 파급력이 높은 분야입니다.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 실제 기술과 사회 문제 사이의 연결고리를 고민할 수 있는 매우 실질적인 훈련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Q. 네덜란드로 오시게 된 여정은 어떻게 되나요.

카이스트에서 산업디자인 석사 과정을 할 때, 저는 한국에 디자인공학 연구를 처음 도입하신 분 중 한 분인 이건표 교수님의 연구실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도교수님과 연구실 선배들의 추천으로 파이썬(Python) 같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도 함께 배우게 되었고요. 그때 문득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점점 컴퓨터 언어에 익숙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컴퓨터 과학자가 되어가는 걸까? 아니면 디자이너로서 나만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술 역량을 키우는 와중에도 디자인 고유의 관점과 문제 접근 방식을 어떻게 놓치지 않고 가져갈 수 있을지가 저에게 중요한 고민이었습니다. 두번째는, 당시는 디자인 결과물을 구현해내는 도구로서 프로그래밍 언어들을 많이 사용했지만, “디자인 과정을 수행하는 방식 자체나 디자인 방법론을 데이터 과학이나 컴퓨터 공학을 통해 더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라는 질문이 생긴 거죠. 이 질문은 점점 깊어졌고, 결국 박사 과정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디자인이 다룰 수 있는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인가?” “내가 익숙한 디자인 방법론들을, 데이터 기반 과학기술을 통해 진화시킬 수는 없을까?” 이런 철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고민들을 탐구를 하기 위해선, 디자인 방법론과 이론에 강한 기반을 갖춘 곳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델프트 공대였습니다. 델프트는 무려 300 여명의 디자인 교수진을 갖추고 있고, 정말 다양한 관점과 분야에서 디자인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마치 세계 디자인 연구의 축소판 같다고 느꼈습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는,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필립스 헬스케어(Philips Healthcare)였습니다. 필립스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기업으로 불리는데, 디자인이 단순히 ‘미적 부가가치’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Business)와 연구(Research)와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는 구조를 갖고 있어요. 디자인이 제품, 서비스 컨셉 단계부터 중요한 전략적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하는 몇 안 되는 글로벌 조직 중 하나였죠.

 

마침 필립스에서도 “AI와 데이터 사이언스를 통해 디자인 방법론을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필립스와 델프트 공대가 동시에 진행하는 박사 프로젝트에 선발되어, 박사과정의 1년 정도를 아인트호벤에 위치한 필립스 본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전 세계 헬스 시스템 혁신의 실무 프로젝트들을 수행했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어떤 니즈(Needs)가 있는지 피부로 경험했고, 이론과 현장이 서로 얼마나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Q. 연구자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또한, 교수님께서 롤모델로 삼으신 여성 연구자가 있으셨나 혹은 기억에 남는 멘토나 선배, 동료 연구자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연구자의 길을 걸어오며,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들은 지금 함께 일하는 여성 리더들입니다. 특히 제가 존경하는 여성 연구자 네 분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계시며, 리더십과 학문적 깊이,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함을 겸비하신 분들입니다. 

 

박사 과정 시절 저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Maaike Kleinsmann 교수님, 그리고 현재 제가 함께 일하고 있는 에라스무스 대학병원(Erasmus University Medical Center)의 외과장이신 Joke Hendriks 교수님, 저희 학과의 섹션 리더이신 Judith Rietjens 교수님, 에라스무스 병원의 호흡기내과 전문의이신 Marlies Wijsenbeek 교수님 모두 여성 연구자로서 훌륭한 롤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분들은 단지 학문적 깊이에 그치지 않고,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선명한 비전과 실천력을 겸비한 분들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있는 판단과, 연구가 사회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행동하고 연결하는 자세를 보여주셨고, 저는 그 안에서 ‘리더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분들은 구성원 각자를 대하는 존중과 따뜻함의 태도 속에서도 결코 비전을 흐리지 않는 단단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연구하고 협업하며 제가 느낀 점은, 저는 이분들을 통해 여성 리더십이 ‘예외적’이거나 ‘희귀한’ 것이 아니라, ‘보통의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분들은 그룹원 모두에게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리더십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저 역시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며, 모든 사람이 편견과 장벽 없이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하고 따뜻한 연구 공동체,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는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누군가에게는 "여성임에도 리더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저의 능력과 태도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리더’ 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저도 앞으로 이 길을 걸어갈 다른 여성 과학자와 공학자들에게 “당연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일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Q. 네덜란드의 연구소가 갖는 라이프 스타일의 특징이 있나요?


박사 과정을 시작할 무렵, 제 지도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는 마치 운전면허와 같다. 누구나 면허를 딴다고 해서 바로 F1 드라이버가 될 필요는 없듯, 연구도 마찬가지다. 박사학위를 통해 세상을 당장 바꿔야 한다는 부담을 갖기보다는, 연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그 길 위에서 천천히 사회에 기여하면 된다.” 이 말이 저에게 큰 박사 학위 동안 큰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위로가 되었고, 지금은 저도 같은 마음으로 제 박사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네덜란드 연구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여유’입니다. 그 여유 속에서 자유가 태어나고, 그 자유 속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자라고, 그 창의성 안에서야말로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가 탄생한다고 믿습니다. 즉, 필요할 때는 온 힘을 다하지만, 불필요한 과잉 경쟁은 지양하는 태도가 이곳 연구 문화의 건강함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큰 특징은 협력 중심의 연구 철학입니다. 개인의 ‘성과’보다도 얼마나 협업을 잘하는 사람인지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아요. 논문에서도 1 저자 수보다 누구와, 어떤 맥락에서, 사회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공학은 실험실 안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속에서 기여하며 살아 움직여야 한다” 라고 말을 늘 듣습니다.

 

 

Q. 연구가 잘 안 풀릴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취미나 리프레시 방법이 있으신지요.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연구가 잘 안 풀릴 때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연구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보는 것이 저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해요. “나는 연구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연구하는 사람이다.”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시간 속에서, 저는 다시금 ‘사회 속의 한 사람’으로서 제 존재를 느끼고 안정을 찾습니다. 그런 단순한 시간이 연구보다 더 제 마음을 깊이 채워 주기도 해요.

 

운동 루틴도 소중해서 토요일 아침에는 오전 8시에 일어나 8시 반에 요가를 가고, 10시 반에 카푸치노를 마시고, 11시에 수영을 하고, 12시 반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합니다. 주중 저녁에도 매일 운동을 하려 하고요.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나면, 짧은 루틴 하나하나를 지켜낸 제가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다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요.

 

주말에는 의식적으로 연구와 완전히 다른 활동을 합니다. 친구들을 만나 음악회에 가거나, 미술관을 방문하거나, 산책하는 등 전혀 다른 일들로 주말의 삶을 채우는 일들이 많아지면,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져요. 주말에 리프레시가 잘 되면, 월요일 아침에는 오히려 더 힘차게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고요.

 

스트레스 관리란 ‘연구’라는 큰 흐름 안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단단하게 유지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에게는 사람과의 연결, 운동 루틴, 예술과 자연의 시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자원입니다.

 

 

Q.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음 세대, 중고등학교의 여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보다 잘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과 지식을 끊임없이 찾아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최고가 되는 것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사람.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유일한 존재로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해외, 특히 비영어권 국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환경 속에서, 종종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만이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무엇일까?’ 그 질문 덕분에,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내가 가진 고유한 시선과 전문성, 태도가 있었기에 누군가는 반드시 그 가치를 알아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과학자나 공학자를 꿈꾸는 중고등학교 여학생 여러분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 세상의 오래된 시스템과 편견 때문에, 여러분이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펼칠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저 또한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과 남성 과학자·공학자 선배님들이 열어주신 길 위에 서 있는 것 처럼, 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연구자들 역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여러분이 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현장에서 힘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과학과 공학안에서 본인의 가능성이 느껴진다면, 망설이지 말고 도전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