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DID IT >
나와 우리의 근원을 찾는 진화유전학자
비엔나대학교 한소정 박사(Ep.1)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쉬디드잇(She Did It)은
대한민국 유일의 여성과학기술인
롤모델 발굴 프로젝트입니다.
2025년 쉬디드잇 시즌 6는
‘글로벌’을 테마로 전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재외한인 여성과학기술인을 조명합니다.
과학기술의 언어로 세계와 소통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길을 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여성과학기술인의 삶과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써 내려간 이야기가 ‘우리’가 써 내려갈 이야기가 되도록
예비 여성과학기술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영감을 전하고자 합니다.
비엔나의 한소정 박사는 생물학자,
그중에서도 영장류학과 진화인류학을 공부하는
진화생물학자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질문에 대해 과학의 힘으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인 보노보를 연구하며,
박물관에 박제된 시료들을 통해서 인간과 생명의 근원을 찾는
그의 끝없는 탐구의 길을 같이 걸어보자.
Q. 처음 과학을 좋아하게 된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나시나요?
학창 시절에는 궁금한 것이 많고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과학 선생님들께서 ‘궁금이’라고 부르신 것이 기억나네요. “삶의 의미는 무엇이지?” “사람은 무엇이지?”와 같은 질문을 늘 궁금해했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진화학’으로 이끌렸습니다. 행동 생물학과 유전학을 모두 접해봤는데, 특히 유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재미있었고요.
Q. ‘진화’에 푹 빠지게 된 이유는요?
아프리카 우간다 숲에서 침팬지 데이터를 확보하는 한소정 박사(사진 Fred Bercovitch)
처음에는 학부에서 생명과학을 공부했습니다. 학부를 마치고 구조생물학 실험실에서 연구하다가 다시 교토로 간 것은 생물학 중에서도 특히 ‘진화’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몰랐던 개념은 아니지만 진화 관련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그 연구와 결과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너무너무 재밌었습니다. 약간 스파크가 오듯이 그냥 나는 죽기 전에는 이거는 해야겠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의 평생의 과제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풀어가는 것이에요.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내가 이 세상을 보아야 하는가와 같은 것들이 어렸을 때부터 늘 숙제 같이 따라오는 질문이었는데, 진화가 그런 의문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고 느꼈고 그래서 엄청나게 끌렸던 것 같아요.
Q. 진화에 끌려 본격적으로 연구자가 되셨군요!
이미지 출처 토마스 마르케스 X
교토대학에서 제가 원하는 영장류 행동 생물학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었고 영어로 할 수 있는 석사 과정이 개설될 무렵이었고 이에 컨택을 해서 가게 됐어요. ‘행동 생물학’을 전공하고 침팬지, 보노보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의 진화에 대해 유전체를 바탕으로 연구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건너갔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연구중심대학 폼페우 파브라 대학에 계신 토마스 마르케스 교수님 실험실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마르케스 교수님은 영장류 유전체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세요.
돌아보면, 저에게 유학은 그때 그때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Q. 지금은 비엔나 대학교에서 진화에 대해 연구하고 계시죠? 먼저 비엔나 대학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University of Vienna
저는 현재 오스트리아 비엔나(빈)에 있는 비엔나 대학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비엔나 대학은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큰 대학으로 비엔나시 이곳저곳에 다양한 학부와 연구소, 부속 시설들이 나뉘어 분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부마다 연구소마다 그 구성과 분위기가 매우 다릅니다. 제가 소속된 곳은 생물학부의 진화인류학과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에 새로 시작하는 랩이 많아, 건물 전체에 생동감이 있습니다.
새로운 랩들이 최신 방법론과 다양한 포커스를 갖고 있고, 그 랩을 이끄는 교수와 구성원들이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어 여러 층위에서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요.
저희 연구실은 론 피나지(Ron Pinhasi) 교수님이 멘토이신데, 피나지 교수님은 인간의 뼈와 치아 등을 시료로 해서 인간의 역사를 주로 연구해오셨습니다. 진화 인류학(Evolutionary Anthropology)의 큰 포커스는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 인간과 상호작용이 있던 동물들을 중심으로 하는데, 저의 경우에는 인간과 가까운 근연종을 연구해요. 저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연구실 동료들은 인간이 살던 동굴의 그 안에 남아 있는 DNA 등을 연구합니다.
처음에는 포닥(박사후과정)으로 이 학과에 들어왔고, 연구하면서 제 펠로우쉽(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제공되는 연구지원금)을 얻게 되어서 하고 싶었던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Q. 지금 진행중이신 연구 주제는 무엇인가요? 연구에 대한 비전도 소개해 주세요
©동아사이언스
저는 진화생물학자로서 현재 비교유전체학을 활용하여 보노보의 진화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분야는 종 수준과 개체군 전체에 걸친 보노보의 다양성과 적응입니다. 최근 논문에서는 보노보의 암컷 생식 형질을 침팬지와 비교하여 유전적 변화의 풍부함과 연관시켰으며, 이는 보노보의 적응적 특성으로 제시되었습니다.
펠로우쉽 연구는, 박물관에 수집된 영장류 표본을 이용해 이들의 유전체를 재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들의 진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침팬지, 보노보의 구하기 어려운 유전체를 오래전에 수집해 놓은 표본에서 얻는 것이기도 하고, 따라서 혹시라도 지금은 절멸한 이전에 유전변이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도 하고요. 여기에서 곁가지 친 다른 연구는, 같은 시료에서 이들의 유전체만 아니라 이들이 감염되었던 병원체의 유전체를 복원해 이들의 진화를 살펴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장류와 이들의 병원체의 관계를 보는 한편, 이 병원체들이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을 숙주로 하는 병원체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구자로서는 이 연구들이 흥미롭게 발전해 가는 것이 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오마이뉴스에 연재하신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연구 생활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집필 활동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근에는 글을 쓸 짬이 나지 않아 연재 글을 멈춰두었습니다만, 그 이전에 한동안 글을 썼습니다. 처음 시작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에 바이러스의 유전체를 통해 감염의 경로와 시점을 추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등을 설명하는 글이었습니다. 이후 저희 분야에서 흥미로운 연구들을 소개하고, 병원체 연구를 시작한 뒤로는 병원체에 대해 설명하는 글들을 쓰기도 했고요. 일반 독자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제 관련 분야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동기였습니다.
Q. 여러 대륙과 도시에서 생활하실 때 어려웠던 점은 없으셨나요?
여러 대륙을 거치며 산 세월은 재미있기도 하고 물론 힘든 면이 있기도 하고 했습니다. 문화적 다양성이 있다 보니 서로 오해하고 오해받는 일들이 흔히 일어나지요. 경험은 배움을 낳는 법이라 지금에 와서는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눈과 품을 조금은 배웠다는 위로를 받는 날도 가끔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하루는 결국 어디를 가나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Q.EKC 2022대회에서 ‘오스트리아의 젠더 이슈 및 정책’을 주제로 발표하신 내용도 궁금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젠더 이슈에 대한 발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었어요. 성차별의 문제는 오스트리아의 학계에서도 여전히 큰 문제라는 의미에서요. 물론 상대적으로 과거에 비해 나아지고 있고 다른 몇 나라에 비해 나을 수는 있더라도요. 제가 속한 생물학부에는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10년째 이어오고 있는 ‘Women in Biology (WoBio)’라는 소모임이 있습니다. 저도 몇 해째 참여하고 있고요. 이곳에서는 관련 정보와 책을 함께 읽고 나누는 모임, 여러 롤모델이 되는 연구자들을 모시고 여는 세미나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Q. 연구자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분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이미지 출처 아이다 안드레스(Aida M Andrés) X
저의 연구자로서의 길에는 정말 많은 분들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가깝게는 결정의 순간들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던 순간에 함께 해준 동료들, 선생님들이 계셨고, 멀게는 미리 학문의 길을 닦아 놓으신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계셨고요. 리처드 도킨스, 프란스 드발과 같이 좋은 학자이자 좋은 작가로서 진화와 영장류 행동에 대한 개념들을 쉬운 언어로 설명해 주어 저의 이해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잘 설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보여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여성 연구자 중에 본받고 싶은 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들 또한 여러분 중 한 분을 언급하자면, 런던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집단유전체학을 연구하시는 아이다 안드레스(Aida M Andrés) 교수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학자로서 늘 날카롭고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동료로서는 부드럽고 포용하는 언어와 태도를 실천하는 모습이 저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습니다.
Q.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과학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관찰하고 얻은 통계와 패턴, 규칙들을 논의하고 예측하는 모든 활동이니까 누구든 과학에 관심을 가지면 삶에 도움이 됩니다. 재미있기도 하고요. 혹시 연구자의 길을 가고 싶다면, 지금부터 좋은 질문을 하고 가설을 세우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치들을 찾는 연습을 해보세요. 다른 사람들의 가설과 근거를 과연 그런가? 따져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될 겁니다. 좋은 연구자는 많은 지식도 중요하지만 질문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박물관에 보관된 수백 년 전의 동물 표본에서, 때로는 아프리카 밀림에 남은 유인원의 흔적에서, 한소정 박사는 시료를 채취하고 유전체를 시퀀싱하며 유전체의 복원, 진화의 흔적을 쫓는 연구를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내일과 미래를 향해 달려갈 때, 묵묵히 우리의 근원을 찾아 수만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연구가 우리에게 전해줄 새로운 해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