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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개발사례

롤모델

[She Did It] #111 오사카 대학 박소영 교수

조회수314 작성일2025.06.19

일본 아카데미아를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도전과 성장으로 연구자의 길을 걸어가다

오사카 대학 박소영 교수 (Ep.1)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의 쉬디드잇(She Did It)은 

대한민국 유일의 여성과학기술인 

롤모델 발굴 프로젝트입니다.

2025년 쉬디드잇 시즌 6는

‘글로벌’을 테마로 전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재외한인 여성과학기술인을 조명합니다.

과학기술의 언어로 세계와 소통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길을 낸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여성과학기술인의 삶과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써 내려간 이야기가 ‘우리’가 써 내려갈 이야기가 되도록

예비 여성과학기술인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영감을 전하고자 합니다.

 

과학을 사랑했던 한 소녀가 있었다. 여전히 과학이란 여학생보다는 남학생들이 하는 공부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꿈을 꺾지 않고 한걸음씩 꾸준히 나아간 소녀는 마침내 꿈에 이루었다. 

일본 교토대학교 화학과 최초의 한국인 여성 조교수가 되었고, 지금은 면역 단백질을 타겟으로 한 신약 후보 물질 개발에 몰두하는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는 박소영 교수 이야기다.

 


박 교수는 유기화학, 생화학, 핵산화학, 면역학을 넘나드는 융합 연구를 통해 ‘DNA 하이브리드 촉매’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일본 학계를 넘어 주목 받는 성과를 거두며 세계적인 연구자로 발돋움했다. 토요타 라이징 펠로우 1회 수상자, 시세이도 여성연구자상 수상자로도 이름을 올린 그는, 일본이라는 낯선 연구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개척해왔다.

 

 

Q. 교수님께서는 학창 시절 어떤 학생이셨나요?

스스로 기억하기로는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화학 시간에 선생님의 실험을 도우며 화학에 특히 흥미를 느꼈고, 그중에서도 고체 나트륨이 물과 만나 불꽃을 내는 실험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자연과학부에서 다양한 수업을 들으며 고민하다가, 결국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남들은 화학 약품 냄새가 싫어서 전공을 후회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그 냄새가 좋더라고요.

 

 

Q. 대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는 학부로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는데 여대 특유의 자유롭고 따뜻한 분위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자연과학부 건물이 언덕 위에 있어서, 겨울에도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숨이 찼지만, 친구들과 함께여서 늘 즐거웠습니다. 실험 후엔 2층 큰 테이블에 모여 다 같이 레포트를 쓰곤 했는데, 그 친구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가고 있어요. 시험 기간엔 도서관에서 밤을 새기도 하고요. 열심히 공부했는데 생화학 시험에서 B를 받아 잠시 좌절했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Q. LG화학에서 근무하셨다가 교토대로 유학을 가서 박사과정을 밟으셨습니다. 그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카이스트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LG화학에 입사해 고분자 촉매 연구를 했습니다. 좋은 동료들과 즐겁게 지냈지만, 마음속엔 항상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어요. 사실 석사 졸업 후 취업을 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인 상황이었거든요. LG화학이 대전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주말에 카이스트 도서관에 갈 수 있었고, 거기서 친구들을 보면 괜히 부러웠죠. 그 뒤로도 나도 진학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니까 ‘안 되겠다, 그냥 유학을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1년 후에 회사를 그만 두고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석사 때 로듐 촉매를 이용한 연구를 했는데, 마침 그 분야에서 교토대 하야시 교수님의 연구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었어요. 지도 교수님이셨던 장석복 교수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하야시 교수님을 추천해주셔서 유학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 때 그 결정이 지금까지 일본에서 연구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네요.

 

 

Q. 유기화학을 전공하시다 생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네, 당시 미국이나 유럽으로 포스트닥을 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일본에 남게 되었습니다. 조금 낙심했지만, ‘장소를 바꿀 수 없다면 분야를 바꿔보자’는 마음으로 유기화학에서 생화학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솔직히 쉽지 않았습니다. 생화학 실험은 전혀 경험이 없어서, 전기영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거든요. 석사생들도 척척 해내는 실험을 저는 끙끙대며 1년 넘게 익혀야만 했죠. 한 달에 한 번씩 발표를 하는데 계속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니까 저는 그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또 그다음 달에도 똑같은 내용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너무 부끄러웠죠. 심지어 나는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는데 부담스럽기까지 했어요. 그 과정을 거치는 게 진짜 힘들었는데 교수님께서 참고 기다려주시기도 했고 저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냥 견디는 것 외에는 정말 요령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1년 반 정도 지나고 나니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점점 재미가 붙었습니다. 그 시간이 참 힘들었지만, 버텨내고 나니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점점 생화학 자체가 정말 재미있어진 거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유기화학에서 생화학으로 연구 분야를 바꾸며 어려움이 많았어요.

1년 동안은 맨 땅에 헤딩을 하는 심정으로 기초부터 끙끙대며 익혔죠.

기다려주시는 교수님을 보며 저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1년 반 정도가 지나니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죠.

그 시간까지 참 힘들었지만, 버텨내고 나니 생화학 자체가 정말 재밌어졌어요.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Q. 그 시간을 거쳐 교토대 최초의 한국인 여성 조교수로 임용되셨습니다. 어떤 연구 성과가 있었나요? 그 과정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박사후 과정 중, 네덜란드 Feringa 교수님의 DNA 헬리컬 키랄리티를 활용한 비대칭 반응 논문을 접했어요. 보자마자 ‘이 분야야말로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다!’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유기화학자로서의 강점을 살려, 염기서열과 촉매 활성 부위를 체계적으로 설계하고 조합했어요. 

그 결과 ‘모듈라 DNA 하이브리드 촉매(Modular DNA Hybrid Catalysts) ’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수 있었고, 이 연구가 좋은 평가를 받아 조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습니다.

 

 

Q. 시세이도 여성연구자상과 토요타 라이징 펠로우 수상자로도 선정되셨죠. 수상의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시세이도 상을 받았을 땐, 출산 후 두 달 만에 복직해서 연구에 매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말 지치고 불안하던 시기였는데, 이 상이 큰 위로와 동력이 되었어요. 토요타 라이징 펠로우는 전국에서 세 명만 선정된 프로그램이었고, 저는 한국인 최초 수상자였죠. 수상 메일을 받고 남편에게 울면서 전화했더니,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라더라고요(웃음). 

수상은 늘 기쁘지만, 동시에 ‘이제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외국인 여성 과학자로서 더 많은 시선이 쏠리다 보니 부담감도 있죠. 하지만 그조차도 제 연구의 원동력이 됩니다.